정읍-전주 답사 (1일차)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는 나아가는자 입니다.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여행포스트인데, 잘 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시작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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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8

나는 오랫동안 '동학농민전쟁답사'를 가고 싶어 했다. 조선의 臣民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는 시민이 되기 까지 여러가지 단계가 있을 것이나, 그 거대한 변화의 첫걸음이 동학농민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학농민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정읍과 전주를 가보려고 예전부터 마음을 먹고 있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한번가야겠다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 다녀왔다.  기간은 2.18에는 정읍으로 가서 하룻밤 잤다가, 2.19에 전주에 가서 하룻밤을 머문 다음 2.20일에 서울에 올라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답사 였다.


(위 사진은 2.18 버스 시간표- 화질이 구려서 죄송합니다. ㅜㅜ)

사진에 나와있는 9시 20분차를 타고 정읍으로 향했다. 사실 약간 늦잠을 자는 바람에 출발시간 3분전에 간신히 도착해서 겨우 탑승했다. 출발한지 3시간쯤 지난 12시 시 20분 즈음에 드디어 정읍에 도착했다.

정읍에 도착한 때가 딱 점심시간이라서 많이 출출했다. 어디가서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전에 다른 블로그에서 보았던 '양자강'이라는 중국집에 가서 명물이라는 '비빔짬뽕'을 먹으러 갔다.
(관련 포스팅은 여기: http://blog.naver.com/rjw0507?Redirect=Log&logNo=120155498795 )

(위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
비빔짬뽕은 풍부한 해산물 이외에 돼지고기까지 들어가서 깊으면서도 걸쭉한 맛을 냈는데, 꽤 괜찮았다.  평생에 꼭 이건 먹어봐야한다...는 정도는 아니지만, 정읍에 오면 한번 먹을만 하다고는 생각했다.

자, 점심도 먹었으니, 이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가볼까~ 하는데, 발견한 것.

우암 송시열 선생의 수명 유허비! 
 사실 별 생각없이 길을 지나가는데 (중국집 양자강에서 딱 10m떨어져 있었다.) 눈앞에 이런 중요한 사적지가 있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불려오던중에 정읍의 객사에서 사약을 받아 죽게된다. 그리고 이 수명 유허비가 있던 지역은 곧 정읍의 객사자리이며, (객사는 읍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후일 노론에서 '송자'라고까지 받들여지는 우암 송시열이 죽은 곳인 것이다. 사실 송시열의 죽음은 붕당정치가 당쟁으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도록 주도한 남인은 노론과는 화해할 수 없는 강을 건너간 셈이었으며, 온건파였던 소론은 이일로 서인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강경파인 노론이 서인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숙종은 남인과 서인의 당쟁, 환국, 노-소론의 분열 등을 조장한 책임을 갖고 있다. 그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선비들이 죽어나갔고, 그 원한은 후대에 깊은 상처로 남아 조선의 정치를 회복하기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그러나 나는 숙종이 그렇게 까지 해서 얻은 권력으로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나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동학농민기념관으로 향했다.
(위 사진은 황토현 전적지 방향에서 찍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1시50분에 탑승한 시외버스는 2시 10분쯤에 나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앞에 내려주었다. 사실 이동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는 거리의 문제보다 배차의 문제가 컸다. 참고로 정읍시내에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방향 버스는 하루에 6번 운행된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1층에서 전근대시대 농민의 생활을 소개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또한, 세계적인 국주의와 혁명들을 소개하여 외적인 흐름과 요인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2층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꽤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다만, 설명내용은 내가 알고 있던 것이 많아서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설명을 읽다보니 내가 읽었던 우리학교 교수님의 책 -민중운동의 사회사<박찬승 저>-가 많이 떠올랐는데, 혹 교수님께서 감수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정도 걸렸다.

이어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로 향했다.
 
(가까이 보이는 기와집은 아마 화장실이었던 것 같고, 좀 더 뒤에 아련하게 보이는 건물들이 전적지이다.)
 
설명을 보니 황토현은 30m 높이의 작은 구릉으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흔한 구릉이 흔하지 않게 된 것은 이곳에서 사회의 모순에 맞서싸운 용기있는 사람들의 결단이 스쳐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 황토현에서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출발한 군대와 보부상들을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의 지방권력을 무너뜨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기실 조선시대에 수많은 민란이 있었지만 지방권력에 맞서서 이를 무너뜨린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황토현 전투 이후에 황룡촌 전투에서 화력에서 앞서는 경군(서울에서 내려온 군대)의 일부를 무찌름으로써 농민군은 전주성 입성이라는 조선역사 이래 일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위 사진은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사당의 모습. 가운데 위패에는 '무명동학농민혁명군'이라 써져있고, 그외에 다양한 위패들이 있다.)
 나는 황토현 전적지의 사당에 들어가 꺼진 향불을 다시 붙이고 재배를 했다. 시대의 정의를 위해 결단하고, 목숨을 걸었던 분들에게 그만한 예우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이라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사당을 나오면서 황토현 전투의 다른 한편의 사상자인 관군과 보부상측의 희생자들에게도 명복을 빌었다.


 이렇게 황토현 전적지까지 둘러 보았을 때 벌써 오후 4시 30분이었다. 달랑 두 군데를 보았는데, 원래 계획에 잡고 있었던, 전봉준 고택, 박정기의사 기념관, 고부향교와 관아 등을 보아야 했는데 너무 시간이 부족하고 교통편도 막막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 택시를 타기로 했다. 다행히도 친절한 택시기사님과 협상해서 얼마간의 돈을 드리기로 하고(정액제) 남은 일정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으로 간 곳은 가까운 전봉준 고택이었다.
(위 사진이 전봉준 고택의 본 건물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

 복원된 전봉준 고택은 작은 초가집이라서 내가 이전의 답사에서 보았던 여러 위엄있는 대갓집들 보다 정겨웠다. 이 작은 집에서 민중과 함께 숨쉬면서도,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전봉준은 사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작은마을의 훈장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시대를 만나 세상을 한번 건져보겠다는 결의로 세상에 나섰던 셈이다. 고택에는 참배할 장소가 없어서, 고택을 나와 고택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전봉준의 가묘를 찾아갔다.
(위 사진이 전봉준의 가묘)

전봉준의 가묘는 시신없이 후대에 만든 것인데, 여기에서 100m만 더 가면 전봉준의 아버지의 묘소가 있다. 전봉준의 아버지 역시 지방관리의 학정에 맞서서 민중을 대표해 정소를 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마땅히 참배했어야 했는데, 나중에 숙소에 돌아가서 정읍에서 나온 '정읍이야기'라는 책을 읽다가 뒤는게 아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다.

묘소를 참배한 이후에는 서둘러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위 사진은 기념관에 있는 사당)

기념관에는 구파 백정기 의사의 활동에 대한 전시실과 참배할 수 있는 사당등이 있었다. 구파 백정기는 아마도 아나키즘 테러리스트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따로 기념관이 차려져있지 않나 싶었다. 일제시대에 아나키즘운동은 꽤나 활발했지만, 해방이후에는 좌우의 극단적 대립속에서 그 위치를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계급사회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와도 친밀성이 있으나, 국가의 중앙집권제화와 이에 따른 권력화를 우려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례로, 레닌의 공산당이 집권하자 가장 먼저 감옥에 간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가 아나키스트 들이었다.)

(기념관에 있는 그의 어록.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찍었다.)
그나마 백정기 의사가 기념되는 것은 김구가 봉안한 3의사 가운데 한분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록을 보면 '자유평화'와 '몰살'이 같이 나온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에게 가장 폭력적인 일을 강요했던 시대를 백정기 의사는 뚜벅뚜벅 걸어갔던 것 같다. 기념관을 둘러보던중 문닫을 시간이 되어 다 보지는 못했다.

이어서 고부 향교와 관아건물지로 갔다. 고부향교는 꽤나 컸다.
 향교의 크기가 전주향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지금껏 봐왔던 여러 지방의 향교중에서는 큰편이었는데, 과거 고부가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는 말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위에 있는 사진은 고부향교의 사당인데, 이 높다란 계단을 올라야 사당이 있다. (잠겨 있어서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평지였다면 전묘후학의 형식일텐데, 경사진 곳이기 때문에 제향공간을 위로 두기 위해, 전학후묘의 형식을 취한 것 같았다.

강학공간인 명륜당도 규모가 꽤 큰편이었다.

한편, 이 고부향교 바로 옆이 고부초등학교인데 원래 고부관아 자리였단다.
(사진을 보면 초등학교와 향교가 바로 붙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배운바에 따르면, 향교는 보통 성 밖에 있고, 관아는 성안에 있어서 서로 붙어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러다가 고지도가 나온 안내판을 보자 이해가 갔다.
(위 사진이 고지도를 배경으로 한 안내판)
안내판에 나와있는 고지도를 보면 성벽이 없다. 곧, 성이 없기 때문에 향교와 관아가 붙어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제 슬슬 과사 근무시간이 끝나가기에 몇점의 석탑을 본것과 저녁밥을 먹은 이야기는 뒤에 덧붙이겠습니다.-

by 나아가는자 | 2012/03/30 17:51 | 요즘 근황및 생각 | 트랙백 | 덧글(2)

민주주의자로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거부하는 이유

(이 글은 보편적 무상급식 -저는 이를 '의무급식'이라 부르지만- 을 주장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이번 주민투표를 거부하는 이유와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

그리 길지 않은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채 민주주의를 살해한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848년 혁명으로 수립된 프랑스의 제2공화정은 남성 시민들의 보통선거에 의해 나폴레옹 3세를 황제로 하는 ‘민주제정’을 수립했다. 짧디 짧은 민주공화국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역사 에서도 보통선거에 의해 박정희의 1인 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 두 사례 모두 정치적 반대의 목소리를 물리적으로 탄압한 가운데 국민에게 양자택일을 ‘민주적인투표’ 절차를 통해 강요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투표’에 의해 질식당하고 말았다. 요컨대 민주주의자라면 민주주의적 절차에 충실함은 물론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민주적인 것인지, 아니면 민주'독재'적인 것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유신독재의 역사적 경험위에 서 있는 우리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물리적 탄압을 쉽게 용인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도 다행히 물리적인 탄압 없이 정치적인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위의 사례들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도한 이번 주민투표 사이에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발견된다. 권력자가 투표의 시기와 투표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투표일을 정하고, 최악과 차악을 교묘히 섞어 자신에게 유리한 차악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차와 포를 뗀 다음 장기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그 두 가지는 독재자들이 대중민주주의 시대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직접투표를 선호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오시장 측은 처음에는 이번 주민투표가 투표율미달로 무산될 때에는 ‘전면’이든 ‘단계’든 무상급식 정책 자체가 무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한나라당의 신지호 의원을 비롯하여 일부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주장한다.) 그리하여 휴가철인 8월로 투표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제처가 주민투표의 무산은 무상급식의 무산이 아니라, 투표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자 오시장은 8월에서도 휴가가 대부분 끝나는 8월하순인 24일로 투표일을 정했다. 이처럼 이번 주민투표는 그 투표일부터가 오시장측의 정치적 계산에 좌우된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이번 주민투표를 반민주적으로 만든 것은 오시장측이 투표의 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번 투표의 문안은 ‘전면’대 ‘단계’의 양자택일 구도이다. 그러나 보편 무상급식의 주장자들도 학년별로 단계적인 확대시행을 주장해 온 사람들이 많았기에, '단계'와 '전면'은 제대로 논쟁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오시장측과 무상급식을 주장한 사람들의 논쟁은 무상급식의 확대시기가 아니라, 무상급식의 범위를 둘러싼 것이었다. 따라서 소득구분 없이 지원하는 ‘보편 무상급식’인가, 아니면 소득에 따라 지원하는 ‘차별 무상급식’인가로 투표문안을 작성하는 것이 진실에 부합된다. 물론 이런 투표구조는 이번 주민투표의 반대자들에게 유리한 틀이기에 오시장측이 받아들일리 만무하다. 요컨대, 오시장측의 권력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투표문안에서 반대측의 목소리를 없애고 자신의 목소리만 남긴 셈이다.

이것이 다원성에 입각한 민주주의와 얼마나 어긋나는지는 약간의 사고실험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총선에서 각 정당에 투표할 때 그 정당에서 내세우는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에 투표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 민주당, 진보신당 식으로 인쇄된다. 그러나 만약 이를 정부여당의 뜻대로 바꾸어 국가번영당, 퍼주기당, 극좌당 식으로 투표용지를 인쇄한다면 투표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불보듯 뻔하다.

만약, 이번 주민투표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을 남기고자 했다면 '전면'대 '단계'라는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용어를 투표용지에서 삭제하거나, 아니면 '보편'과 '차별'이라는 상대편의 목소리도 담겨야했다. 그러나 이번 주민투표는 이런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갖추지 못했다. 민주주의자라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이자 미덕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투표가 최소한의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있는 여지를 갖추었을 때에 하는 것이다. 양자택일만을 강요하며, 동시에 상대편을 자기 마음대로 색칠하는 투표는 다원적인 민주주의에서 한참 벗어난다. 이런 투표를 통해 만들어질 체제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독재, 곧 북한이 그토록 주장하는 '민주독재'와 다를바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번 투표는 총선, 대선 등의 일반적인 투표와 상반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끊임없이 샘솟으며 시원한 물을 제공해주는 우물과 같다.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우물을 통해 시민의 의사라는 시원한 물을 길러 마신다. 그러나 지금 권력자는 우리의 우물에 독을 푼 다음 평소와 같이 길러 마시라고 재촉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역시 겉으로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죽음이라는 침묵을 권력으로부터 강요당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자신이 지켜오던 법이 자신을 노리는 부당한 칼이 되었음을 알아차렸지만,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합법적인 독배거부권이 있었다면 과연 그는 독배를 마셨을까? 비극의 역사를 반성해온 성숙한 민주주의는 다행히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와 같은 죽음이 아니라, 투표거부로써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저항할 권리를 부여했다. 따라서, 단순히 투표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독재적 민주주의가 아닌 다원적- 공화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투표일 때에만 참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민주'독재'적인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저들의 절차적 정당성만 키워준 채 아무런 소득없이 민주주의적 열정만 사그라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by 나아가는자 | 2011/08/23 16:01 | 역사, 정치, 경제에 대한 잡설 | 트랙백 | 덧글(6)

무상급식 전면실시 반대 주민투표에 불참하는 이유에 대하여


1. 나는 지금껏 내게 주어진 투표에는 모두 참여해 왔다.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등은 물론이고, 대학교 학생회선거까지. 심지어는 총학생회 결선투표로 내가 지지하지 않는 두 선본이 올라왔을 때에도 나는 투표에 참여해서 무효표를 만들었을 지언정 투표 그 자체에는 참여했다. 투표는 권리이자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신념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며, 단지 내가 지금껏 이렇게 행위해 왔다는 점만을 알리고 이 글을 시작하고 싶었다.

2.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투표에 참여해왔기 때문에, 이번 무상급식 전면실시 반대 주민투표도 나의 정치적 입장이 어떠하건 간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에 불리할 수 있다고 하여 투표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나의 신념에 맞지 않았다. 그런점에서 민주당에서 단지 이번 투표의 사안을 가지고 투표에 반대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주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운 형태이므로, 가능한한 권장되어야 하며, 설사 이번 투표처럼 상당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투표라도 투표자체는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이번에 주민투표 서명부는 80만명을 넘어선 모양이다. 41만명 남짓이 필요했는데에도 그 두배에 가까운 서명자수를 보니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저번 서울시의회시절(2006-2010에 서울광장관련 조례 개정을 위한 주민청원에 대한 서명받기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겨우 7-8명의 유효 서명수를 받았을 뿐이고, 당시 8만명남짓이 필요했는데, 그 수를 겨우 넘긴바 있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이번 주민투표 서명수는 엄청나게 많은 편인데, 그 이유는 내 생각엔 정말로 무상급식을 전면실시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다거나, 혹은 이번에 서명을 받은 세력이 대형교회등의 강한 조직력을 갖춘 집단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둘 다 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내가 보고 겪은게 없었다면 이렇게만 생각했을 것이다.

4. 대략 한 달 전의 일이다. 내가 자주가는 책방(책대여점)에서 책방주인누나와 친한 누나를 만났다. 나는 그 책방과 10년 정도 교류해왔고, 주인누나와 친한누나와도 지난 몇년간 일주일에 한두번 보는 사이이다. 서로 얼굴도 알고, 익숙한 편인 셈이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이번 무상급식 전면실시 반대 주민투표 청원 서명서를 내게 내밀며 서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나로서는 무척 난감했는데, 보편적 무상급식(사실 난 의무급식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을 큰 틀에서 찬성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는 의도를 가진 서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그 누나에게 왜 갑자기 이런 것을 하는지 물었다. 내가 알기로 그 누나는 그닥 정치적인 이슈에 관심있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누나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 회사 사장이 직원들에게 1인당 100장씩 서명받아오라고 할당해서 어쩔 수가 없어." 옆에 있던 책방주인누나도 사장의 어처구니 없는 이런 일에 대해서 함께 욕하긴 했으나, 직원인 누나의 입장을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서명한 모양이었다. 결국 책방에 다니는 사람들의 서명을 모아 그 누나는 자신에게 할당된 100장을 다 채웠다고 했다. 

5. 사실 대중동원이라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특히나, 좌파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 낮은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데, 대중동원에 필요한 언론권력은 우파에 비하면 부족하므로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 간접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정치엘리트 안에서 좌파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좌파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중동원을 많이 해왔다. 그래서 각종 서명운동을 많이 했는데, 내가 참여한 것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적을 본적은 없지만, 혹시라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열망은 큰데 현실의 힘이 받쳐주지 않으면 부정의 유혹에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부정이 있을 경우에 그런 부정이 일어난 부분에 대해서 무효로 인정해야 함은 명백할 것이다.

6. 그러므로 이번 주민투표 청원에서도 아주 심한 부정이 아닌 한, 부정이 일어난 부분만 무효로 하고도 법에서 정한 숫자(41만명 남짓)를 넘는 서명부를 모았다면 투표를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사실 대중동원에서 정치적 열정은 필수적이고, 그런 열정의 동원 과정에서 열정이 과도한 나머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은 비일비재하므로, 그런 것을 너무 과도하게 억압하면 대중의 정치적 열정 자체를 압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어난 부정행위를 묵과할 수는 없으므로, 부정이 일어난 부분은 무효로 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7. 그러나 내가 목격한 것은 결코 '아주 심한 부정이 아닌'것이 아니었다. 만약 어떤 목사가 자기 신도들에게 이런 서명을 하라고 설교했고, 그래서 많은 신도들이 서명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비판하고 말지언정 아예 불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장이 직원에게 할당하는 것은 명백히 아주 심한 부정행위라고 생각한다. 사장과 직원의 관계는 사장이 직원의 밥줄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그 누나도 이런 일을 굉장히 불쾌해했지만, 뒤에서 욕할지언정 차마 사장에게는 아무소리도 못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장이 직원에게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상당히 좋지 않은일인데, 100장씩 할당해서 서명을 받아오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자본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의사를 억압한 것이다. 그것도 매우 심각하게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주 심한 부정행위가 저질러진 이번 무상급식 전면실시 반대 주민투표에 불참할 것이다.

8. 물론 나의 이런 경험담에 대해서 근거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다. 사실 이 일을 신고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누나의 생계를 책임질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함부로 신고를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무책임한 행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추가적인 증거를 요구한다 해도, 나는 이 일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경험담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뜻에 달려있다.
 사실 나 역시 다른 사람이 경험담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시위때 우리 어머니의 친구중에 교회다니는 친구분이 우리 어머니에게 '촛불시위는 김정일을 추종하는 세력이 주도한 것이며,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그 세력이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이다. 내가 직접 촛불시위현장에서 돈봉투를 시위에 참여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촛불시위현장에서 돈을 받은적도 없고, 돈을 나눠주는 것을 본적도 없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많은 인원들에게 돈을 나눠줘서 동원했다는 것도 있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즉, 내가 겪은 경험담의 사실성 여부는 내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이야기를 꼭 믿어달라고 독자분들께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내 경험담 그 자체는 내 명예를 걸고,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는 점만을 밝힐 수 있을 따름이다.

by 나아가는자 | 2011/06/17 02:09 | 역사, 정치, 경제에 대한 잡설 | 트랙백(1) | 덧글(11)

앎이란 무엇인가?

앎이란 무엇인가?

 


- 이 글은 2011년 1학기에 청강한 ‘철학의 기초’ 수업에서 내가 낸 중간고사 답안지이다. 문제는 ‘앎이란 무엇인가?’ 이었다. 많은 오류가 있겠지만, 교수님이 지적한 곧 3곳만 수정하였다. -

 

 

   앎. 그것은 이 세계에 사는 인간이 추구하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앎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에 대해 먼저 서술해야 한다.

   세계는 복잡한 연관관계를 가진 개체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다양한 개체들을 경험한다. 이 개체들을 하나의 언어로 규정하여 이 개체들에 대한 경험을 이성을 활용한 생각 안에 두기 위한 것이 개념이다. 개념을 통해 인간은 생각한다. 개념이 없으면 이성은 사용될 수 없고, 인식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인식하는데,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넘어 이성을 활용하여 생각해야 한다. 감각능력은 수동적이기에 인간이 잘못 쓸 염려는 없지만, 이성은 능동적인 능력이기에 인간이 이를 활용할 때에는 올바른 개념을 논리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이성능력의 행위, 곧 생각은 추상을 그 대상으로 한다.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추상은 진리라는 빛이 비추어질 때 이성이라는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때 진리는 불변, 보편, 필연을 그 성질로 가지면서, 형식적인 조건인 모순율, 근거율을 충족시켜야 하고, 동시에 실질적인 감각능력에 의해 그 참됨이 확인되어야 한다. 이처럼 엄밀하게 정의된 진리에 의해서 이성이 대상을 바라볼 때 자의적인 앎이 아니라 진정한 앎에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이런 과정자체가 곧 인식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만 가지고는 왜 앎이 우리의 삶과 연관되는 지가 분명치 않다.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진리의 빛을 볼 수 없으며, 앎을 향해가는 길도 마치 걸음마와 같아서 수없이 넘어져야만 가능하다. 왜 인간은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도 앎을 추구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인간의 욕구, 채워짐을 갈망하는 그 욕구를 보아야 한다. 이간은 자신의 유한성, 시간성, 불완전함, 현실에 있지만 무한성, 영원성, 완전함, 이상을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은 현재의 자신을 넘어 더욱 이상에 가까운 자신을 욕구하고, 욕구의 대상인 ‘새로운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관심은 현실과 이상사이에 서있는 ‘나’가 그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이다. 이 지점에서 반성이 등장한다. 나의 잘못된 부분을 후회하고, 이를 다른 인간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다시 새로운 나를 향해가는 이 과정들이 반성이다. 따라서 욕구, 관심, 반성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성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반성에서 우리는 다른 인간을 거울로서 자신을 비춰본다. 이 거울에 따라 잘못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못된 나’로 이끌 수도 있다. 특히 주변거울이 온통 왜곡된 것들만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보편적인 기준, 변하지도 않고 필연적인 그 무엇이 필요하다. 바로 이 그 무엇을 채워주는 것이 인식이다.

   그러나 인식에 멈추어 있는 것은 진정한 앎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앎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 모두를 꿰뚫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추상, 변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만으로는 진정으로 ‘앎’에 다다랐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필요한 것이 ‘이해’이다. 이해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대등한 인식과는 달리, 주체가 객체에 깊이 몰입하여 그 객체를 주체가 스스로 재구성 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는 대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또, 그 대상과 그 대상의 뒤에 숨어있는 세계의 연관성을 추적하여 그 의미를 파악한다. 이해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자신이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물을 넘어 세계의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해낸다. 따라서 이해는 인식보다 더 깊은 앎이다.

   그러나 이해만으로는 진정한 앎을 채울 수는 없다. 이해는 잘못하면 현상에 대한 정당화에 머무르게 된다. 이해가 그 대상을 이해하려는 자기결단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해만으로는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다. 이때, 인식을 통해 얻은 앎, 곧 보편적인 것으로서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인식이 없이는 앎은 방향을 찾을 수 없고, 이해 없이는 앎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진정한 앎은 인식과 이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의 정리는 내가 이해한 앎에 대한 개념들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것이 틀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더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앎.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서있는 자리와, 앞으로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내가 방금 열거한 그 두 가지를 과연 알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앎은 삶과 연결된다.

   삶은 이 세계에 던져진 우리가 세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행위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삶은 타인에 의해 주어질 수 없다. 스스로 세계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물론, 그 의미파악을 위한 세계관은 인간이 맥락 안에 존재, 곧 역사적 존재이기에 이미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결단을 통해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서 새로운 의미와 그에 따른 행위를 창출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계는 대하소설과 비슷한 거대한 대서사시이다. 각각의 인간은 그 서사시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 이야기쓰기, 곧 자기결단과 그에 의한 창조는 인간의 삶이 가장 빛을 발하는 행위가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앎이, 특히 이해가 필요하다. 세계에 던져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온통 낯선 것들 안에 갇혀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 인간은 영원한 수인(囚人)의 삶을 면치 못한다. 결국 앎은 인간다운 삶, 자신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어 가는 삶, 곧 자유로운 삶의 원천이다. 따라서 앎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곧 올바른 삶이 된다. 좋은 목표를 위한 나쁜 실천은 악이 되기 쉬우나, 좋은 행위는 우리를 좋은 목적으로 이끌 수 있다. 앎을 추구함에 따라 자신의 위치와 세계에 의미부여하는 것 자체가 곧 자유로운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스스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이라면 앎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by 나아가는자 | 2011/04/30 22:20 | 요즘 근황및 생각 | 트랙백 | 덧글(0)

4.19를 맞이하며

- 이 글은 내가 오늘 쓴 글을 약간 수정하여 올리는 글입니다.-

 나는 2009년 이후로 매년 4.19가 다가오면 꼭 글을 썼다.(블로그에 그 글들을 올린 적은 없었다.)
내가 나의 부족한 글 솜씨를 앎에도 불구하고, 매년 조금이나마 글을 쓰려고 노력했던 것은 4.19가 아무런 기념도 되지 않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를 그토록 강한 의무감으로 이끌었던 것은 4.19 혁명에서 피흘린 사람들, 거리를 뛰어다니며 정의를 외친 사람들의 피와 땀 덕분에 내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잠깐 이야기를 삼천포로 빠뜨려보자. 혹시 4.15이 무슨 날인지 아시는가? 아마 얼마전 뉴스보도를 통해 몇몇 분들은 아실 거라 생각하는데, 그 날은 김일성의 생일이다. 김일성의 생일은 1912.4.15이라고 주장되는데, 북한에서는 1년중 가장 중요한 국경일 중 하나로서 떠받들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100년째 되는 해인 2012.4.15에 3대 세습 완료를 선얼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그러면 귀찮은 질문을 하나만 더 하겠다. 혹시 3.26이 무슨 날인지 아시는가? 아마도 이 날이 무슨의미를 가지는 날인지 잘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이다. 아니, 사실 별 의미가 없는 날이다. 2011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날은 바로 이승만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전 국무회의 기록을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기록을 보게 되었다. 1955년 3월과 195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이 대통령 탄신일'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가 논의 되었고, 임시휴일로 하자는 것이 정식안건으로서 국무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을 기념하는 우표도 제작되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은 내가http://eniac90.egloos.com/4559876 에서 보았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나를 국무회의 기록을 검색하도록 인도해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초 발견자는 이분이시다.)

생각해보면,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김씨왕조'로 전환시켰다. 이승만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이승만왕국'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국가는 너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닌 '우리의 것'이며, 특히 근대의 '공화국'은 독재를 철저히 배격한다. 따라서 김일성과 이승만은 남과 북의 공화국을 파괴시킨 파괴자들 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에 대한 집단 연행, 수만명을 굶겨죽인 무지막지한 부패(ex. 국민방위군 사건), 세계사에 길이 남을 창조적인 부정선거, 언론탄압, 거칠것 없이 행해진 학살(ex. 거창학살) 그리고 마침내는 '개인숭배'에 이르기 까지, 이 민주공화국을 이승만 왕국으로 바꾸기 위한 종합선물보따리를 이 나라에 풀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맞서, 경남 마산을 시작으로 용기있는 시민들이 일어섰고, 마침내 1960.4.19에는 총탄이 빗발치는 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외침을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쫓겨갔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쫓겨간날,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이승만이 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려면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라고 쏘아붙여 주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자유로이 선출하고, 대통령의 생일 따위는 알 일이 없고, 떳떳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자유를 가지게 된 것은 4.19, 5.18, 6월 항쟁 과 그 사이의 시간동안 독재와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덕이다. 그들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을 자신들의 피로써 채워넣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는 북한과 같은 끔찍한 독재정부, 세습왕조가 아닌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에서 우리가 사는 이유가 위대하신 '건국대통령 이승만' 덕분이라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가 요란하다. '공칠과삼'이라느니, '이승만 대통령과 4.19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등의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우리의 자유를 파괴하려한 파괴자가 '건국자'가 되고, 피흘려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수호한 건설자, '수호자'들이 공 많은 대통령의 실수에 의한 안타까운 '희생자'가 되는 거짓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2011.4.19에 쓰다.

by 나아가는자 | 2011/04/19 23:48 | 역사, 정치, 경제에 대한 잡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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