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8월 23일
민주주의자로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거부하는 이유
(이 글은 보편적 무상급식 -저는 이를 '의무급식'이라 부르지만- 을 주장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이번 주민투표를 거부하는 이유와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
그리 길지 않은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채 민주주의를 살해한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848년 혁명으로 수립된 프랑스의 제2공화정은 남성 시민들의 보통선거에 의해 나폴레옹 3세를 황제로 하는 ‘민주제정’을 수립했다. 짧디 짧은 민주공화국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역사 에서도 보통선거에 의해 박정희의 1인 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 두 사례 모두 정치적 반대의 목소리를 물리적으로 탄압한 가운데 국민에게 양자택일을 ‘민주적인투표’ 절차를 통해 강요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투표’에 의해 질식당하고 말았다. 요컨대 민주주의자라면 민주주의적 절차에 충실함은 물론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민주적인 것인지, 아니면 민주'독재'적인 것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유신독재의 역사적 경험위에 서 있는 우리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물리적 탄압을 쉽게 용인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도 다행히 물리적인 탄압 없이 정치적인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위의 사례들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도한 이번 주민투표 사이에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발견된다. 권력자가 투표의 시기와 투표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투표일을 정하고, 최악과 차악을 교묘히 섞어 자신에게 유리한 차악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차와 포를 뗀 다음 장기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그 두 가지는 독재자들이 대중민주주의 시대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직접투표를 선호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오시장 측은 처음에는 이번 주민투표가 투표율미달로 무산될 때에는 ‘전면’이든 ‘단계’든 무상급식 정책 자체가 무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한나라당의 신지호 의원을 비롯하여 일부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주장한다.) 그리하여 휴가철인 8월로 투표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제처가 주민투표의 무산은 무상급식의 무산이 아니라, 투표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자 오시장은 8월에서도 휴가가 대부분 끝나는 8월하순인 24일로 투표일을 정했다. 이처럼 이번 주민투표는 그 투표일부터가 오시장측의 정치적 계산에 좌우된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이번 주민투표를 반민주적으로 만든 것은 오시장측이 투표의 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번 투표의 문안은 ‘전면’대 ‘단계’의 양자택일 구도이다. 그러나 보편 무상급식의 주장자들도 학년별로 단계적인 확대시행을 주장해 온 사람들이 많았기에, '단계'와 '전면'은 제대로 논쟁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오시장측과 무상급식을 주장한 사람들의 논쟁은 무상급식의 확대시기가 아니라, 무상급식의 범위를 둘러싼 것이었다. 따라서 소득구분 없이 지원하는 ‘보편 무상급식’인가, 아니면 소득에 따라 지원하는 ‘차별 무상급식’인가로 투표문안을 작성하는 것이 진실에 부합된다. 물론 이런 투표구조는 이번 주민투표의 반대자들에게 유리한 틀이기에 오시장측이 받아들일리 만무하다. 요컨대, 오시장측의 권력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투표문안에서 반대측의 목소리를 없애고 자신의 목소리만 남긴 셈이다.
이것이 다원성에 입각한 민주주의와 얼마나 어긋나는지는 약간의 사고실험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총선에서 각 정당에 투표할 때 그 정당에서 내세우는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에 투표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 민주당, 진보신당 식으로 인쇄된다. 그러나 만약 이를 정부여당의 뜻대로 바꾸어 국가번영당, 퍼주기당, 극좌당 식으로 투표용지를 인쇄한다면 투표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불보듯 뻔하다.
만약, 이번 주민투표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을 남기고자 했다면 '전면'대 '단계'라는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용어를 투표용지에서 삭제하거나, 아니면 '보편'과 '차별'이라는 상대편의 목소리도 담겨야했다. 그러나 이번 주민투표는 이런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갖추지 못했다. 민주주의자라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이자 미덕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투표가 최소한의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있는 여지를 갖추었을 때에 하는 것이다. 양자택일만을 강요하며, 동시에 상대편을 자기 마음대로 색칠하는 투표는 다원적인 민주주의에서 한참 벗어난다. 이런 투표를 통해 만들어질 체제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독재, 곧 북한이 그토록 주장하는 '민주독재'와 다를바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번 투표는 총선, 대선 등의 일반적인 투표와 상반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끊임없이 샘솟으며 시원한 물을 제공해주는 우물과 같다.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우물을 통해 시민의 의사라는 시원한 물을 길러 마신다. 그러나 지금 권력자는 우리의 우물에 독을 푼 다음 평소와 같이 길러 마시라고 재촉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역시 겉으로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죽음이라는 침묵을 권력으로부터 강요당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자신이 지켜오던 법이 자신을 노리는 부당한 칼이 되었음을 알아차렸지만,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합법적인 독배거부권이 있었다면 과연 그는 독배를 마셨을까? 비극의 역사를 반성해온 성숙한 민주주의는 다행히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와 같은 죽음이 아니라, 투표거부로써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저항할 권리를 부여했다. 따라서, 단순히 투표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독재적 민주주의가 아닌 다원적- 공화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투표일 때에만 참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민주'독재'적인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저들의 절차적 정당성만 키워준 채 아무런 소득없이 민주주의적 열정만 사그라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by | 2011/08/23 16:01 | 역사, 정치, 경제에 대한 잡설 | 트랙백 | 덧글(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