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전주 답사 (1일차)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는 나아가는자 입니다.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여행포스트인데, 잘 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시작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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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8

나는 오랫동안 '동학농민전쟁답사'를 가고 싶어 했다. 조선의 臣民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는 시민이 되기 까지 여러가지 단계가 있을 것이나, 그 거대한 변화의 첫걸음이 동학농민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학농민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정읍과 전주를 가보려고 예전부터 마음을 먹고 있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한번가야겠다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 다녀왔다.  기간은 2.18에는 정읍으로 가서 하룻밤 잤다가, 2.19에 전주에 가서 하룻밤을 머문 다음 2.20일에 서울에 올라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답사 였다.


(위 사진은 2.18 버스 시간표- 화질이 구려서 죄송합니다. ㅜㅜ)

사진에 나와있는 9시 20분차를 타고 정읍으로 향했다. 사실 약간 늦잠을 자는 바람에 출발시간 3분전에 간신히 도착해서 겨우 탑승했다. 출발한지 3시간쯤 지난 12시 시 20분 즈음에 드디어 정읍에 도착했다.

정읍에 도착한 때가 딱 점심시간이라서 많이 출출했다. 어디가서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전에 다른 블로그에서 보았던 '양자강'이라는 중국집에 가서 명물이라는 '비빔짬뽕'을 먹으러 갔다.
(관련 포스팅은 여기: http://blog.naver.com/rjw0507?Redirect=Log&logNo=120155498795 )

(위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
비빔짬뽕은 풍부한 해산물 이외에 돼지고기까지 들어가서 깊으면서도 걸쭉한 맛을 냈는데, 꽤 괜찮았다.  평생에 꼭 이건 먹어봐야한다...는 정도는 아니지만, 정읍에 오면 한번 먹을만 하다고는 생각했다.

자, 점심도 먹었으니, 이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가볼까~ 하는데, 발견한 것.

우암 송시열 선생의 수명 유허비! 
 사실 별 생각없이 길을 지나가는데 (중국집 양자강에서 딱 10m떨어져 있었다.) 눈앞에 이런 중요한 사적지가 있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불려오던중에 정읍의 객사에서 사약을 받아 죽게된다. 그리고 이 수명 유허비가 있던 지역은 곧 정읍의 객사자리이며, (객사는 읍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후일 노론에서 '송자'라고까지 받들여지는 우암 송시열이 죽은 곳인 것이다. 사실 송시열의 죽음은 붕당정치가 당쟁으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도록 주도한 남인은 노론과는 화해할 수 없는 강을 건너간 셈이었으며, 온건파였던 소론은 이일로 서인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강경파인 노론이 서인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숙종은 남인과 서인의 당쟁, 환국, 노-소론의 분열 등을 조장한 책임을 갖고 있다. 그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선비들이 죽어나갔고, 그 원한은 후대에 깊은 상처로 남아 조선의 정치를 회복하기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그러나 나는 숙종이 그렇게 까지 해서 얻은 권력으로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나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동학농민기념관으로 향했다.
(위 사진은 황토현 전적지 방향에서 찍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1시50분에 탑승한 시외버스는 2시 10분쯤에 나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앞에 내려주었다. 사실 이동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는 거리의 문제보다 배차의 문제가 컸다. 참고로 정읍시내에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방향 버스는 하루에 6번 운행된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1층에서 전근대시대 농민의 생활을 소개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또한, 세계적인 국주의와 혁명들을 소개하여 외적인 흐름과 요인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2층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꽤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다만, 설명내용은 내가 알고 있던 것이 많아서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설명을 읽다보니 내가 읽었던 우리학교 교수님의 책 -민중운동의 사회사<박찬승 저>-가 많이 떠올랐는데, 혹 교수님께서 감수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정도 걸렸다.

이어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로 향했다.
 
(가까이 보이는 기와집은 아마 화장실이었던 것 같고, 좀 더 뒤에 아련하게 보이는 건물들이 전적지이다.)
 
설명을 보니 황토현은 30m 높이의 작은 구릉으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흔한 구릉이 흔하지 않게 된 것은 이곳에서 사회의 모순에 맞서싸운 용기있는 사람들의 결단이 스쳐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 황토현에서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출발한 군대와 보부상들을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의 지방권력을 무너뜨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기실 조선시대에 수많은 민란이 있었지만 지방권력에 맞서서 이를 무너뜨린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황토현 전투 이후에 황룡촌 전투에서 화력에서 앞서는 경군(서울에서 내려온 군대)의 일부를 무찌름으로써 농민군은 전주성 입성이라는 조선역사 이래 일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위 사진은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사당의 모습. 가운데 위패에는 '무명동학농민혁명군'이라 써져있고, 그외에 다양한 위패들이 있다.)
 나는 황토현 전적지의 사당에 들어가 꺼진 향불을 다시 붙이고 재배를 했다. 시대의 정의를 위해 결단하고, 목숨을 걸었던 분들에게 그만한 예우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이라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사당을 나오면서 황토현 전투의 다른 한편의 사상자인 관군과 보부상측의 희생자들에게도 명복을 빌었다.


 이렇게 황토현 전적지까지 둘러 보았을 때 벌써 오후 4시 30분이었다. 달랑 두 군데를 보았는데, 원래 계획에 잡고 있었던, 전봉준 고택, 박정기의사 기념관, 고부향교와 관아 등을 보아야 했는데 너무 시간이 부족하고 교통편도 막막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 택시를 타기로 했다. 다행히도 친절한 택시기사님과 협상해서 얼마간의 돈을 드리기로 하고(정액제) 남은 일정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으로 간 곳은 가까운 전봉준 고택이었다.
(위 사진이 전봉준 고택의 본 건물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

 복원된 전봉준 고택은 작은 초가집이라서 내가 이전의 답사에서 보았던 여러 위엄있는 대갓집들 보다 정겨웠다. 이 작은 집에서 민중과 함께 숨쉬면서도,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전봉준은 사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작은마을의 훈장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시대를 만나 세상을 한번 건져보겠다는 결의로 세상에 나섰던 셈이다. 고택에는 참배할 장소가 없어서, 고택을 나와 고택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전봉준의 가묘를 찾아갔다.
(위 사진이 전봉준의 가묘)

전봉준의 가묘는 시신없이 후대에 만든 것인데, 여기에서 100m만 더 가면 전봉준의 아버지의 묘소가 있다. 전봉준의 아버지 역시 지방관리의 학정에 맞서서 민중을 대표해 정소를 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마땅히 참배했어야 했는데, 나중에 숙소에 돌아가서 정읍에서 나온 '정읍이야기'라는 책을 읽다가 뒤는게 아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다.

묘소를 참배한 이후에는 서둘러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위 사진은 기념관에 있는 사당)

기념관에는 구파 백정기 의사의 활동에 대한 전시실과 참배할 수 있는 사당등이 있었다. 구파 백정기는 아마도 아나키즘 테러리스트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따로 기념관이 차려져있지 않나 싶었다. 일제시대에 아나키즘운동은 꽤나 활발했지만, 해방이후에는 좌우의 극단적 대립속에서 그 위치를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계급사회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와도 친밀성이 있으나, 국가의 중앙집권제화와 이에 따른 권력화를 우려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례로, 레닌의 공산당이 집권하자 가장 먼저 감옥에 간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가 아나키스트 들이었다.)

(기념관에 있는 그의 어록.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찍었다.)
그나마 백정기 의사가 기념되는 것은 김구가 봉안한 3의사 가운데 한분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록을 보면 '자유평화'와 '몰살'이 같이 나온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에게 가장 폭력적인 일을 강요했던 시대를 백정기 의사는 뚜벅뚜벅 걸어갔던 것 같다. 기념관을 둘러보던중 문닫을 시간이 되어 다 보지는 못했다.

이어서 고부 향교와 관아건물지로 갔다. 고부향교는 꽤나 컸다.
 향교의 크기가 전주향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지금껏 봐왔던 여러 지방의 향교중에서는 큰편이었는데, 과거 고부가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는 말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위에 있는 사진은 고부향교의 사당인데, 이 높다란 계단을 올라야 사당이 있다. (잠겨 있어서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평지였다면 전묘후학의 형식일텐데, 경사진 곳이기 때문에 제향공간을 위로 두기 위해, 전학후묘의 형식을 취한 것 같았다.

강학공간인 명륜당도 규모가 꽤 큰편이었다.

한편, 이 고부향교 바로 옆이 고부초등학교인데 원래 고부관아 자리였단다.
(사진을 보면 초등학교와 향교가 바로 붙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배운바에 따르면, 향교는 보통 성 밖에 있고, 관아는 성안에 있어서 서로 붙어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러다가 고지도가 나온 안내판을 보자 이해가 갔다.
(위 사진이 고지도를 배경으로 한 안내판)
안내판에 나와있는 고지도를 보면 성벽이 없다. 곧, 성이 없기 때문에 향교와 관아가 붙어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제 슬슬 과사 근무시간이 끝나가기에 몇점의 석탑을 본것과 저녁밥을 먹은 이야기는 뒤에 덧붙이겠습니다.-

by 나아가는자 | 2012/03/30 17:51 | 요즘 근황및 생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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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12/04/26 14:11
잘 읽었습니다. 이중 들른 곳은 송시열 유허비밖에 없군요. 다음에 다시 갈 때 더 자세히 보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나아가는자 at 2012/04/27 09:56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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